공모전

11회
수필 부문

대상 - 익숙한 그러나 새로운

엄태성 약사

수필 부문

갑자기 머리를 무언가로 얻어맞은 듯했다. 어제 같던 청춘이 쏜살같이 지나고 이제 오십 문턱을 막 넘어서고 있었다.

지금의 약국으로 이사온 지 십 년이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처음 들어간 권리금과 갖가지 비용은 대출금과 지인의 도움으로 충당을 했었다. 몇 년 만에 그 비용을 다 청산했고 조금씩 천천히 오로지 나만의 것을 쌓아가고 있던 중이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 과정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처방전을 발급하던 의원이 있는 앞 건물 일층에 새 약국이 들어온 것이다. 누가 보아도 경쟁이 안 되는 구조였다. 우리 약국은 맞은편으로 길을 건너 한참을 걸어가야 하는 수고로움이 든다.수년간 이어진 단골이라는 인연을 기대한다고 해도 경제적으로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나의 우려는 곧 현실로 다가왔다. 원래도 적던 처방전은 반의 반 토막이 났고 일반약 매출도 반으로 줄어들었다. 한 달이 지나가고 카드 값과 각종 공과금이 빠져 나가는 통장 잔고를 보고 있자니 무력감이 밀려왔다.

석 달 넘게 적자를 보며 약국을 억지 운영하다 보니 무기력을 지나 분노가 치밀었다. '돈이 없어서 이런 꼴을 당하나' '잘난 부모를 못 만나 이런 취급을 받나' 결국 감정은 자책을 지나 원망을 향해가고 있었다.

 

별다른 대안 없이 반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제약 회사 직원과 아는 지인 심지어 부동산 사장님한테도 좋은 약국 자리 있으면 꼭 소개시켜달라는 부탁을 여러 차례 해놓았다.

여차하면 이곳을 떠나 새로운 약국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예전에는 환자들이 약국에 들어섰을 때 손에 들고 있는 처방전에 시선이 닿아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그들의 얼굴과 눈빛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많지 않은 처방전으로 시간의 여유가 생기다 보니 환자들 기분과 몸 상태 심지어 개인 사연까지도 관심 대상이 되었다.

그 환자들 중 상당수는 일부러 우리 약국을 이용하러 먼 길을 돌아오는 단골들이었다. 빨간 지팡이 할머니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걸음이 약간 불편해서 빨간색 지팡이를 짚고 다니시는데 먼 길을 돌아 우리 약국을 들어오면서 딸과 항상 티격태격 하신다. 할머니는 다리도 불편하신데 왜 더 먼 약국을 가냐는 딸 말을 일축해버리곤 한다. 사람 사이의 오랜 정이 그게 아니라는 게 할머니의 설명이다. 할머니는 다리도 아프고 혈압도 있으셔서 한 달에 두 번 정도 약국을 방문했다. 거의 대부분 딸과 함께 오셨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여러 번 할머니는 혼자 약국을 오셨다. 약을 들고 우두커니 약국 유리창 밖만 쳐다보고 한숨짓기가 일쑤였다. 종이컵에 녹차를 잠깐 우려내 건네며 무슨 걱정거리 있냐고 여쭈어봐도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할머니가 녹차를 다 마실 때까지 환자 한 명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고 의자에 걸쳐 놓은 지팡이를 들고 문밖으로 향했다. 다음번에 오시면 평소와 달리 슬퍼 보이셨던 이유를 알아보리라 생각했지만 한참 동안 할머니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친분 있는 제약 회사 직원에게 다른 곳에 괜찮은 약국이 나왔냐고 재촉전화를 하려고 하는데 빨간 지팡이 할머니가 약국을 들어오고 있었다. 소화가 잘 안된다며 마실 소화제를 찾으셨다.

지팡이를 바닥 구석에 던져 놓고 앉아서 물약을 벌컥벌컥 들이키셨다. 속이 안 좋으시냐는 말에 대답대신 긴 한숨을 내뱉고 계셨다. 한참을 머뭇머뭇 하시더니 말문을 여셨다. 항상 같이 다니시던 따님이 몇 달 동안 연락 없이 집에 오지 않았단다. 독립해서 혼자 살고 싶다며 자취방을 얻어 나갔다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불안해보였다. 일시적인 헤어짐으로 이해하고 계셨었는데 그 기간이 길어지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고 하셨다. 사실 할머니의 딸은 가슴으로 낳은 딸이었다. 약국을 오신 지는 오래 되었지만 최근에서야 이 이야기를 힘들게 풀어 놓으셨다. 자식이 없던 할머니 댁에 누군가가 몰래 놓고 갔다는 딸이 애타게 기다리는 바로 그 딸이었다.
계절이 바뀌어 벚꽃이 껍질 안 속살을 꿈틀꿈틀 헤집고 나올려 할 때 빨간 지팡이 할머니가 상기된 얼굴로 약국 문을 열었다.

지팡이 손잡이 끝 부분에 푸른 색 리본을 둘둘 말아놓은 걸로 봐서는 기분 좋은 일이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필요한 약을 다 사놓고도 한참을 댁으로 가시지 않고 앉아 있는 이유를 물어봤더니 할머니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딸이 데리러 온다는 말이었다. 몇 달 만에 다시 돌아온 딸이 데리러 온다는 것이다. 할머니와 같이 살기 위해 가지고 나갔던 살림살이 짐을 전부 싸가지고 돌아왔단다. 온갖 고생을 하며 수십 년을 키워냈어도 핏줄이라는 연결고리가 없어 자주 불안해하던 할머니에게 보이진 않지만 단단한 띠같은 연결 고리가 생긴 듯 보였다.

딸과 함께 댁으로 돌아가시는 할머니의 발걸음은 한껏 가벼워 지팡이가 땅을 닫지 않고 공중을 떠다니고 있었다. 문 안에서 지켜보는 나를 뒤돌아보며 할머니는 딸의 등을 토닥거리고 계셨다. 마치 지금 여기 있는 딸이 진짜 할머니 딸이라고 자랑하고 계신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확인 받고 싶은 것 같았다. 자기 딸이 확실하다고.

 

여기저기 부탁해 놓은 곳 중 한 군데서 연락이 왔다. 괜찮은 약국 자리가 있다고 했다. 근처 병원 처방전 발급이나 유동인구로 봐서 지금 약국보다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경쟁 약국이 없어서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적어 보였다. 조금 생각해보고 전화 주겠다고 말했더니 전화가 여기저기 많이오니 빠른 대답을 기다리겠다고 했다. 오후의 끝이라 하기엔 너무 밝은 초저녁 쯤 아기 엄마가 들어오는 바람에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오세요'라는 말에 갓난아이 엄마는 눈인사를 하며 처방전을 건넸다. 조제를 하고 있는 중에도 아이는 엄마 품에 안겨 연신 기침을 하며 힘들어 했다.

그런 아이를 쳐다보는 엄마의 눈엔 걱정이 한가득 차있었다. 아이 상태를 물어보다가 이런저런 얘기를 하게 되었다. 아기가 건강하게 살라며 '강건'이라고 이름을 붙여 주었다고 했다. 강건엄마가 결혼하고 임신하며 출산한 과정을 지켜본 나로서는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돌이 지났냐는 나의 질문에 지난주에 가족끼리 돌 행사를 했단다. 다음 주에 이차 항암 들어가는 강건엄마는 아들 생일잔치를 하고 병원에 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다. 강건엄마는 늦은 결혼 후 수년간 난임으로 고생하다 어렵게 얻은 아들을 마음껏 안아보기도 전에 암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일차 항암 치료를 받으러 갈 때도 온통 아들 걱정 뿐이었다. 어리디 어린 생명을 뒤로하고 치료를 받으러 가는 아이엄마 마음을 어찌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약을 받고 약국을 나선 후 강건엄마는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난 혹시 아이엄마 몸이 안 좋아져서 주저앉은 줄 알고 밖으로 나가보았다. 강건이의 손을 꼭 잡고 계단 앞 작은 자투리땅에 핀 꽃을 쳐다보고 있었다.

몇 주 전부터 초록색 잡초처럼 올라오더니 곧게 뻗은 줄기 중간 중간에 강한 노란색 꽃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지저분하게 보일까 싶어 뽑아버릴까 하다가 시간이 흘러버린 것이다. 곧 깨끗하게 뽑아내어 정리할거란 말에 강건엄마의 표정이 금세 굳어졌다. 언제부터 꽃이 피었는지 이름은 무엇인지 등등 여러 가지를 물으며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아이를 껴안고 집으로 걸어가는 강건엄마의 그림자가 꽃을 덮으며 길어지고 있었다. 한참 동안 동네에서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강건엄마의 연락을 받은 건 문자 메시지를 통해서였다. 다음 주 삼차 항암치료를 들어가는데 그동안 동네 의원에서 먹던 약 이름을 적어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문자를 보내고 나서 약국 계단 옆으로 고개를 돌리며 핸드폰 카메라를 들었다. 잡초라 생각해서 뜯어내 버릴까했던 노란 꽃. 그 주변으로 빙빙 돌려 울타리를 쳤다. 그런데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없던 새끼손톱만한 꽃이 피고 있었다. 아마 큰 꽃의 씨앗이 옮겨졌나 보다 생각했다. 그렇게 가까이 어미 꽃과 애기 꽃이 건강하게 자라고 있었다. 나는 강건엄마에게 다시 한 번 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가끔 보시던 약국 앞 꽃은 잡초가 아니고 기린꽃이래요. 그새 하나가 아니고 바로 옆에 가족이 더 생겼어요. 애기꽃. 둘 다 아주 건강하게 잘 커가고 있어요.'


꽃을 찍은 사진을 첨부하며 문자 송신버튼을 눌렀다.
초여름 저녁 하루를 마무리하며 카운터에 앉았다. 바깥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누구의 엄마, 누구의 보호자, 누구의 아내. 불과 일 년 전만해도 그들의 처방전 약 이름과 가지고 있는 질병의 종류, 그리고 그것과 연결된 돈벌이 가 내 관심사의 전부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의 사연과 고민거리가 보인다.

 

어느새 그들의 걱정거리를 지켜보며 같이 공감하는 이웃이 되어버린 것 같다. 조용한 도시 속 구석구석을 회색빛 어둠이 채우고 있을 때 쯤 제약회사 직원의 전화를 받았다.


"약사님, 지난 번 부탁하신 약국 자리요. 좋은 곳이 나왔어요. 의원 하나에 바로 밑 일층인데 경쟁 약국도 없고요. 처방전 숫자가 많아요. 보시면 알겠지만 만족하실 거예요."
"알아 봐주셔서 감사한데요. 다른 분에게 소개해주세요. 전 한동안 여기서 일을 더 해야 할 것 같네요."
"아니, 왜요? 지금보단 경제적으로 훨씬 괜찮을 텐데요. 다른 이유라도 있나요?"
"이곳에서 배울 게 남아있어서요. 그동안 몰랐어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